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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IBE] 최만순의 약이 되는 K-푸드…연근, 진흙에서 피어난 양생의 뿌리

  • 연합뉴스
  • 2026-02-09
  • 12
            
            [K-VIBE] 최만순의 약이 되는 K-푸드…연근, 진흙에서 피어난 양생의 뿌리

[※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K컬처팀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연못의 진흙 속에서 자라는 식물이 있다. 가장 더러운 곳에 뿌리를 두었으나, 수면 위로는 가장 맑고 고결한 꽃을 피워 올린다. 연꽃이다. 그리고 그 연꽃의 생명을 땅속에서 묵묵히 이어주는 줄기가 바로 연근이다. 연근은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지탱하는 뿌리이며, 동아시아 전역에서 수천 년 동안 몸을 다스려 온 대표적인 약선 식재료다.

연근을 자르면 속이 비어 있고, 잡아당기면 하얀 실 같은 섬유가 끊어질 듯 이어진다. 옛사람들은 이를 두고 "연은 끊어져도 실은 이어진다(藕斷絲連)"고 했다. 관계는 멀어져도 마음은 이어진다는 뜻이다. 이 말은 단순한 감상적 비유가 아니다. 연근의 생리 구조와 효능, 그리고 위기의 시대를 견뎌온 동아시아 민중의 삶의 태도를 함께 꿰뚫는 표현이다.

약선학에서 연근은 맛이 달고 성질은 차다. 심장·간·비장·위장으로 들어가 열을 내려주고, 탁해진 혈을 맑게 하는 식재료로 알려져 왔다. 특히 생연근은 체내에 쌓인 열을 식히고, 흥분된 혈을 가라앉혀 코피·각혈·혈뇨 같은 출혈을 멎게 하는 데 쓰였다. 명·청대 의서인 '본초강목'과 송대의 '성제총록'에는 생 연근즙이 여름철 열사병, 코피, 입안 출혈 등에 효과적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의 '동의보감 역시 연근을 "심열(心熱)을 내려 혈분(血分)의 열을 식히는 약식"으로 분류해 활용했다.

반대로 연근을 익히면 성질이 달라진다. 차던 기운은 부드럽게 따뜻해지고, 비장을 보하고 혈을 보충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오래 삶거나 찐 연근은 소화를 돕고 설사를 멎게 한다고 여겨져 허약한 노인과 성장기 아이들을 위한 연근밥, 연근죽, 연근조림에 자주 쓰였다. 같은 뿌리라도 '생'과 '숙'에 따라 작용이 달라지는 점에서 연근은 양생학의 교과서 같은 식재료라 할 수 있다.

도가 사상의 노자는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긴다"고 했다. 연근은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지만, 단면을 보면 속은 비어 있고 구멍이 이어져 있다. 바로 이 비어 있음 덕분에 공기가 통하고 수분이 저장되며, 오랜 시간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다. 현대 식물생리학 관점에서도 연근의 다공 구조는 산소 공급과 양분 저장에 유리한 형태로 알려져 있다. 비어 있어야 채워지고, 낮아야 오래 간다는 도가 양생의 '허(虛)의 철학'을 연근은 땅속에서 조용히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연근의 대표적인 효능은 지혈이다. 특히 마디 부분인 연근절에는 타닌 성분이 풍부해 혈관을 수축시키고 출혈을 줄이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한의학에서 보아 왔다. 현대 연구에서도 연근 추출물이 혈관 수축, 항산화, 염증 완화에 일정한 효과를 보인다는 결과들이 보고되고 있다. 동서양의 다른 언어가 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셈이다.

전쟁과 재난, 기근이 잦았던 시대에 연근은 생명을 이어주는 비상식량이자 약이었다. 중국 송·원대 문헌과 고려·조선 시기의 기록을 보면 연·연근은 연못과 논 사이, 수량 조절이 어려운 땅에서 안정적으로 수확할 수 있는 구황 작물로 여러 차례 언급된다. 조선의 향약 계통 문헌에도 연근을 길게 캐어 말려 두었다가 흉년이나 겨울철 부족한 곡식을 보충하는 대체 식량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땅속에 숨어 있으면서도 때가 오면 반드시 모습을 드러내는 연근은, 인내와 축적의 시간을 버티게 해 준 뿌리 음식이었다.

현대 영양학적으로 연근은 고식이섬유·복합탄수화물 식품이다. 100g당 약 70kcal 안팎의 열량으로 감자와 비슷하지만, 전분과 식이섬유가 함께 들어 있어 혈당 상승이 비교적 완만하게 일어나는 편이다. 이 때문에 연근은 흰쌀밥 위주 식단과 함께 섭취할 경우 혈당 관리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식품으로 평가된다. 풍부한 식이섬유는 장운동을 촉진해 변비를 예방하고, 담즙산과 결합해 콜레스테롤 배출을 돕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끈적한 점액질 성분의 주역은 뮤신(mucin) 계열 물질과 수용성 식이섬유다. 이 점액질은 위·장 점막을 코팅해 자극을 완화하고, 소화 효소와 함께 작용해 단백질과 탄수화물의 흡수를 조절하는 데 기여한다는 연구들이 축적되고 있다. 당 대사와 관련해서도, 연근의 점액질과 섬유질이 인슐린 분비와 혈당 조절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비타민 C, 폴리페놀 계열의 플라보노이드, 카테킨류 항산화 물질 역시 연근에 풍부해 면역력 유지와 혈액순환, 세포 노화 지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연근은 사찰음식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육식을 피하던 수행자들에게 연근은 귀한 탄수화물·섬유질·소량의 단백질을 동시에 제공하는 에너지 공급원이었다. 불교 미술과 상징체계에서 연꽃이 '진흙 속의 깨달음'을 상징한다면, 그 꽃을 떠받치는 연근은 깨달음을 지탱하는 일상의 밥상에 가깝다. 연근밥, 연근죽, 연근조림, 연근정과 같은 음식은 화려하지 않지만 깊고 단정한 맛을 낸다. 최소한의 양념과 조리만으로도 고유의 단맛과 아삭한 식감이 살아나는 것은 연근 자체의 구조와 성분 덕이다. "자연 그대로가 가장 완전하다"는 도가 사상과 맞닿는 대목이다.

연근은 구멍이 많다. 그러나 그 구멍 덕분에 숨을 쉬고, 영양을 저장하며, 오래 삶아도 형태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마음에 여백이 있어야 숨을 쉬고, 지나간 아픔을 흘려보내며 다시 설 수 있다. 연근을 쇠칼로 자르면 쉽게 갈변하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폴리페놀 성분이 공기 중 산소와 결합해 색이 변하는 현상인데, 옛사람들은 이를 경험적으로 알고 연근을 자를 때는 철제 칼을 피하고 나무나 세라믹 도구를 쓰라고 조언했다. 조리법인 동시에 "서두르지 말고 자극을 줄여 다루라"는 삶의 태도가 담긴 가르침으로도 읽힌다.

연근을 손자병법의 '지형'(地形)으로 읽어보고자 한다. 손자는 여섯 가지 지형을 말하며, 땅을 잘못 읽으면 군대가 싸우기도 전에 무너진다고 했다. 밥상도 다르지 않다. 음식은 몸이라는 전장의 지형을 제대로 읽을 때 비로소 약이 된다.

연근죽은 애형(隘形)이다. 기운이 막히고 소화가 되지 않는 상태, 즉 위장이 답답하고 음식이 잘 내려가지 않을 때 부드럽고 미음 같은 질감의 죽은 좁아진 길을 넓혀 주는 역할을 한다. 연근을 곱게 갈아 쌀과 함께 오래 끓인 죽은 상한 위를 달래고, 병후 회복기의 허약한 기운을 채우는 데 적합한 음식으로 여겨져 왔다.

연근밥은 통형(通形)에 가깝다. 연근을 잘게 썰어 쌀과 함께 지은 밥은 기혈이 고르게 흐르도록 돕는다고 보았다. 탄수화물과 섬유질, 미량 미네랄이 함께 어우러진 연근밥은 과하지 않게 포만감을 주면서도, 과식으로 인한 체증을 덜 느끼게 해 준다. 일상의 기본 병량(兵糧)을 다지는 음식이다.

연근 볶음은 불을 다스리는 괘형(掛形)이다. 센 불에서 재빨리 볶으면 아삭한 식감과 향이 살아나고, 약한 불에서 오래 볶으면 단맛이 더 깊게 우러난다. 열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음식의 성질이 달라지는 만큼, 불 조절은 곧 감각 조절이다. 한 번 잘못 조절하면 재료가 타거나 질겨져 되돌리기 어렵듯, 몸의 화(火)도 한 번 치밀면 가라앉히기 쉽지 않다.

연근 튀김은 험형(險形)을 지나는 요리다. 기름의 자극은 일시적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기분을 환기시키지만, 잦고 많은 섭취는 담(痰)과 열을 만들어 몸을 무겁게 한다. 그래서 튀김은 때와 양을 계산하는 전략이 중요하다. 연근조림은 원형(遠形)에 가깝다. 간장과 단맛, 시간을 들여 천천히 졸여내는 조림 음식은 당장은 강한 자극이 없지만, 장기적으로는 위장과 비장을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장기전용 병량'이다.

연근정과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단맛이다. 적은 양으로 만족감을 주고, 오래 저장할 수 있어 필요할 때 조금씩 꺼내 먹는 비축 병량과 같다. 연근전은 구멍이 드러난 단면이 그대로 보이는 음식이다. 속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면서 서로 다른 재료를 한 데 붙여내는 조리법은, 흩어진 기운을 연결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함께 지닌다.

생연근은 전투 중 응급처치처럼 출혈을 멎게 하고 열을 내리는 쪽에 쓰이고, 익힌 연근은 전후 복구처럼 기혈을 채우고 장부를 보하는 데 쓰인다. 이는 손자병법의 전술과 양생의 원리가 겹치는 지점이다. 고전과 현대 과학은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지형을 가리킨다.

손자병법의 지형은 땅 이야기지만, 결국 사람 이야기다. 몸의 지형을 읽지 못하면 좋은 약도 독이 될 수 있다. 연근은 말없이 가르친다. 비어 있어야 이어지고, 낮아야 오래 간다고.

연근 한 조각에는 약이 있고, 밥이 있고, 철학이 있다. 화려하지 않지만 오래 곁에 두고 먹을수록 몸과 마음을 단단히 해 준다. 음식은 매일 치르는 작은 전쟁이고, 그 조용한 승리가 곧 저속노화의 길이다. 흙 속에서 이어지는 그 하얀 실처럼, 우리의 고귀한 생명은 오늘도 한 그릇의 음식으로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최만순 음식 칼럼니스트
▲ 한국약선요리 창시자 ▲ 한국전통약선연구소장 ▲ 중국약선요리 창시자 팽명천 교수 사사 후 한중일 약선협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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